서양 철학사 논리 실증주의
논리 실증주의의 역사
논리적 분석에 의하면 철학적 과정의 과제와 문제, 주장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지 특별한 철학적 이론을 새롭게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논리 실증주의에 관련된 철학적 연구가 지연되고 늦어질수록 모든 논리적 실증 주의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라는 주장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으로 변화했습니다. 다양한 주관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철학적 구성원들 사이에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여러 의견 차이가 존재했으며 더욱이 그 시대적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의견과 주장이 변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에서는 주관적 견해가 짖은 판단은 경험에 의한 필요 여부에 따라서 후험적일 수 있지만, 그 내용이 확장적인지는 분석, 종합적 견해로 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수학과 같은 경우 칸트의 핵심 주장인 '선험적인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사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인 종합적 판단은 논리 실증 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당했습니다. 수학의 경우 논리학이 분석적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현대 논리학으로 분석될 수 있으며 자연법칙 일체는 오직 경험을 통한 자료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후험적이라고 주장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즉 후험적이며 종합적인 주장과 선험적인 분석적인 주장이 일치하므로 선험적 주장 종합판단은 모순이 된다를 결괏값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1930년대 중반을 시작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해왔던 빈 학파는 나치즘이 발흥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론 철학뿐만 아니라 전치 사회적으로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빈 학파의 리더였던 모리츠 슐리크가 그의 제자 넬 뵈크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위협을 느끼고 해외로 하나둘 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생존한 대부분의 논리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미국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리 잡은 논리 경험주의자들은 미국 전역의 대학교 철학과에서 교수직을 맡으며 곧 미국 철학계의 논리 경험주의 철학을 자리 잡았으며, 이들의 제자들은 이후 분석적 철학의 전통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며 더 이상 이러한 논리 주의자들의 철학은 발전할 수 없게 되었는데, 논리 실증 주의자들의 제자들이 현대 철학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함에도 불과하고 상기한 논리 실증주의 철학 자체가 그 제자들로부터 반대 의견을 압도적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윌러드 콰인(논리 실증 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학자)은 논리 실증주의 철학에 대한 결적적인 반론을 제시하였고,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토머스 쿤의 국제 통일 과학 백과사전 중 한 논리는 실증주의의 과학적 철학을 무너트리는 결정적 명분이 되었습니다.
곧 현대에 들어와 분석철학은 더 이상 그 핵심적인 주장의 명분이 약하게 되었고 논리 실증주의적 이념을 계승했던 노력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실증주의에 대한 오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논리 실증주의가 철학적으로 논파되었다면 과학자들이 추종하는 실증주의는 잘못된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곤 합니다.
이러한 오류의 첫 번째 단계는 철학적인 이론으로서의 느슨한 태도로서 실증주의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느슨한 태도로서의 실증주의란, 과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은연중 인식할 수 있는 애매한 이해로 오해를 만들 수 있으며 "모든 과학적 참구는 근본적으로 경험적 증거에 의해 의존되어야 한다."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